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 전쟁/한국군/논란 (문단 편집) == 한국군 포로 및 은폐 == 민간인 학살만큼이나 잘 안 알려진 문제로 베트남 전쟁 당시의 한국군 포로 문제가 있다. 서울대학교 인류학 교수 전경수 교수가 최초로 베트남 전쟁 박물관의 사진을 토대로 수백 명의 한국군 포로가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다가 채명신 장군 등 참전 군인들의 노력으로 그 사진 자체는 의문시되었다. 물론 한국군 포로 송환은 아니더라도 전사자들에 대한 영현 회수를 위한 연대급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출처 =지옥의 전장 베트남전쟁= 호비스트 출판 p131] 하지만 여전히 전사한 영현을 다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문제가 존재하며 동시에 한국군 포로 문제에 대해서도 제대로 노력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1992년 미국재향군인회의 정보를 토대로 박우식 대위, 박성률 병장, 김인수 상병 이렇게 3명의 실종자들이 북한과 베트남에 생존해 있다는 국내 언론 보도가 나왔고, 4월 21일자 [[MBC]] [[PD수첩]]에서 방송되기도 하였다.[* 당시 취재는 [[송일준]] PD가 맡았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2022900329119001&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2-02-29&officeId=00032&pageNo=19&printNo=14331&publishType=00010|#]][[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204210023913200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2-04-21&officeId=00023&pageNo=32&printNo=21966&publishType=00010|#]] 사실 당시 주월사의 기본 방침은 "'''한국군은 너무나 용감해서 포로가 없었다'''"였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실종자들을 공식 발표한다. 그 중 몇 명은 '''북한에서 생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사실 1973년 파리 협정 당시 북베트남이 억류 중인 한국군 유종철 일병을 송환하였는데 그의 가족은 이미 [[전사]] 통지서를 받은 상태였고 국방부조차 그의 존재를 몰랐다. 이미 유종철 일병은 사망처리된데다가 국립묘지에 묘지까지 만들어 둔 상태에서 이렇게 불쑥 살아 돌아온 것이다. 이후 유종철씨의 [[호적]]은 [[부활]]되어 사망 사실이 정정되었다. 유종철 일병 사건 후에 국방부는 "'''현재 파악된 실종자들은 월북한 상태이고 그들은 반역자다'''"라고 공표한다. 2009년에 들어서야 베트남에서 포로가 된 후 납북된 [[안학수]] 하사에 대해서 한국 정부는 최초로 납북을 인정하게 된다. 안학수 하사는 탈북자들의 말에 따르면 남으로 탈출하려다 실종되었다고 한다.[* 1976년 남한으로 망명한 전 노동당 연락부 365군부대 대좌 김용규의 증언에 의하면 "탈북을 시도했으나, 북한 당국에 체포돼 1975년 총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PD수첩에서 실종 후 베트남 생존 의혹이 제기된 박우식 대위는 2002년 미합동전쟁포로실종자사령부에 의해 유해가 발굴되어 '''전사한 시신이 발견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미국합동전쟁포로실종자사령부에서 유해를 발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박우식 대위가 당시 미군 헬기를 타고 이동중이었고 이 추락한 미군 헬기 잔해를 미국합동전쟁포로실종자사령부에서 조사하다 여기서 유해를 발굴하였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5/0000113132?sid=102|#]][[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185|#]][[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20612/46934265/1|#]] 기본적으로 한국군은 당시 유감스러운 이야기지만 실종자나 포로로 잡힌 병력을 의도적으로 은폐했다[* 이에 대해서는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185|기밀 해제 문서에 담긴 베트남전 국군 포로 실체 참고]]]. 이는 실제 VC들에게 잡혔다가 자신이 탈출했던 태권도 교관단으로 파병 경험이 있는 박정환씨의 '느시'라는 포로 생활 및 탈출을 담은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외 한국군 실종자들의 대응을 봐도 이는 여러 곳에서 한국군이 한국군 포로들이나 실종자들 관리에 매우 허술하거나 은폐했다. 또한 한국군 포로는 이미 미군 포로로 송환되었던 포로 생존자나 CIA의 당시 정황 보고서에도 드러나 있다. 또한 한국군 포로들은 기본적으로 정당한 포로 대우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죽음 혹은 북송'''을 강요받았다[* 시사인의 기사에 따르면, 한국 정부의 의도적인 무시로 인해서, 베트콩이 북한에 3천 불에 팔렸다고 묘사했다.]. 북송 강요는 북한도 당시 베트남전에 북한군 심리전부대와 공군 전투기 조종사등을 파병하여 활동했다는 정황으로 볼 때 북한의 요청에 의해서 북송을 포로들에게 강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군 포로들 대부분은 북송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베트남전 실종자들이 북한에서 생존이 확인되었거나 탈출하다가 사망한 사례가 밝혀진 바 있다.] 이는 나중에 베트남전쟁이 끝나고 나서 미처 피하지 못했던 한국 외교관 포로들에 대한 처우에서도 바로 드러난다. 저런 대우를 받았었기 때문에 한국군 포로들 중에는 포로 학대나 학살을 당했던 사례도 있으며 이는 참전자들 수기에서도 나타난다. 주로 공포심리를 유발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 모습으로 사체를 매달아 놓는 등의 조치를 당했다고 한다. 현재까지 한국군 포로는 9~18명 정도의 정황상의 확인만 가능한 상태이다. 그리고 북한에 생존 및 북송이 확인된 포로만 7명이었다가 위 기술대로 안학수 하사가 탈출에 실패하여 실종된 이후로 현재까지 북한에 확인된 공식적인 베트남전 한국군 포로는 6명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